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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은 집단의식의 공유를 통해 완벽에 가까운 소통상태를 이루고 있는 Borg 종족(?)의 우주선. 오른쪽은 다양한 개성을 지닌 종족으로 구성된 행성연방의 우주선.
- Borg는 소통상태를 이루기 위해 강제적 assimilation을 채택하고 있지만 연방의 경우 negotiation(무력을 동원하기도 함)을 표방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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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de and conquer <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 에서…
포스팅 잘 봤습니다. 읽고나니 의견을 듣고 싶은 부분들이 있어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 Picketline님께서는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셨는데 좀 더 설명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노동도 연대하여 <노동공급회사> 또는 <노동자소유기업>을 만들어 카르텔을 형성하고 담합을 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도 그런 기능을 일부 갖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저항>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본의 기업>이 경영권을 내세우며 정리해고, 구조조정, 인사권 따위는 <우리의 생래적인 권한>이라며 <경영권 신수설>을 주창해도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각하가 철도노조 파업을 <불법>이라 선동한 것의 근본적인 연원은 바로 이런 <경영권 신수설>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신규취업자들은 <자본의 기업>이 아닌 <노동의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기업의 주인으로서 '노동주주'가 될 것이며, '원가절감'을 위해 자본에 돌아가는 '이자'를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어려움에 처하면 <기업 소유주의 생래적인 권한>인 정리해고권을 발동할 수 있다. 즉 <자본>에 대해서 정리해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행의 도산절차와 어떻게 얼마나 다를지는 아직 따져보지 않았지만, 노동기업의 일시적인 경영위험만 닥쳐도 '성실한' 노-자협의만으로 3개월치의 이자만 지불하고 정리해고시킬 수 있는 제도를 상상해보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주주들>은 회사가 어찌되건 <간접 유한책임>만 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마 기업의 소유구조와 경영권이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언하신 것 같습니다만 이런 관점에서라면 아래와 같은 방법이 더 구체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자본 견제 '노동자 펀드' 만든다
나름대로 비판이 없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을 자본으로 견제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고 효과도 크게 작용하리라 봅니다. 따라서 이런 방법과 위에서 제시하신 방법이 어떻게 대비 될 수 있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2. 그리고 포스팅 말미에 제시하신 그림에서 보면 산별노조의 상호이해조정이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이런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앞서 조합설립을 지도하고 가입을 돕는 일종의 지도사를 제안 하셨고 도입되면 전반적인 근로자 조합원화를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는 맥락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노조 노선을 걷는 사업장이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고 근로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조합가입의 필요성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전반적인 근로자 조합원화가 가능할지 의문이 듭니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라고 가정하더라도 산별노조끼리 어떤 식으로 상호 이해조정이 가능할지 의견을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1줄이 연탄이 되어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 된다고 한다. (12월 11일까지)
(대규모 키배가 펼쳐지면 대략 대박이 될 듯 한데.. 농담이고. 아무튼. ^^ )
전태일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권리의식은 향상되고 사회는 민주화 되었다.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고도화되고 복잡해진 이익관계에 따라 여러 형태의 관계설정이 가능한 사회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전태일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근로기준법 준수였고 이와 함께 노동운동은 (노동자+무산자) vs (사용자+자본가+권력기득권) 양측-(계급이라고 해두자)-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기반으로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해 많은 진전을 이뤄왔다.
아직도 큰 틀에서 이런 맥락은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노동운동에서 갈등구조를 형상화하면 대략 아래 같은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겠다.

이런 그림이 가능한 것은 그동안 노동운동이 연대의식 고취를 통하여 사회저변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제기된 갈등 구도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결국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를 가능케 하고 그것을 비호하는 암묵적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틀을 제시하게 된다.
간단하게 누가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인지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명백하게 구분해볼 수 있는 구도가 되겠다.
이런 맥락은 진영과 같이 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공격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점점 이런 틀에 중독되어 사고방식이 굳어져버리고 만다. 근래 어떤 계기로 인해 다시 한번 경험한 바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사람들은 관념적으로 이런 관계를 이해는 하고 있겠지만 실제 생활에서 통용되는 논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처음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이렇다.

소득수준을 수직적으로 표현해봤을 경우 A영역 어딘가에서 조합의 위치를 설정해볼 수 있다. 조합원들 사이에도 소득격차가 존재하겠지만 귀속감이나 연대의식이 있기 때문에 문제시 되지 않는다. 물론 진영논리에 입각해있거나 연대를 선호하는 입장에서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측도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A영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와 달리 조합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측에선 소득격차에서 생기는 괴리감 때문에 부러움과 시기 그리고 자조섞인 자연스러운 감정이 표출되기도 한다. 물론 위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진영논리에 따르는 측으로부터 좀더 강도 높은 불쾌감이 표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눈여겨 볼 것은 A영역에서 양 진영논리를 배제하고 나면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시작된 표현이 종국엔 그림과 같이 묘하게도 서로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양측이 취하는 이익관점은 명백히 다르다.
황당한 것은 단순히 “내 처지는 이런데…”라는 자조에서 시작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영논리에 쩔어 있는 저돌적인 단무지들에게 졸지에 같은 패로 몰리거나 부화뇌동 하는 것으로 치부 되 봉변을 당하기도 하는 낭패가 생기기도 한다. (6.25 때도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많이들 죽었던 것 같다)
A영역에 속한 사람들이 다 진영논리에 휩싸인다고 볼 수도 없고 그것에 입각해 세뇌 당했다고 볼 수도 없는 맹점이 존재한다.
구분이 필요하겠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진영논리에 입각한 접근은 기피해야 할 일이다.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사람들이 주로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손익관계다.
일단 이 관계를 따지기 전에 조합을 살펴보자. 조합은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권력기관에 해당한다. 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대표해 사측과 협상을 할 수도 있고 쟁의행위를 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과 권리가 있는 기구다.
때문에 이것을 노동권력체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아래 그림을 보자.

노사관계만을 보면 조합의 입장에서 사측은 기득권 논리를 바탕(결탁해서)으로 조합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또한 조합은 주로 약자의 입장에서 사측은 노동자의 권익을 탄압하는 강자의 입장으로 포지셔닝 하여 묘사하고 되는데 이런 구도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쟁의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전형적으로 강자의 폭거에 대응해 약자가 저항하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실질적인 손실이나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실력행사의 가능성을 시사해 상대를 억제하려 하거나 혹은 실행에 옮김으로써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내려 한다. (때문에 조직이 필요하고 실효적인 힘이 필요하겠다. 즉 권력체제가 필요하게 된다.)
일단 여기까지는 조합과 사측간의 갈등 관계에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조합이 취할 수 있는 방법론과 산출물이라 하겠다.
그런데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엔 괜찮지만 쟁의행위가 시작 되면 양상은 달라지고 만다. 새로운 손익 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조합은 사측에 손실을 강요하고 A영역에도 고통을 야기한다. 사측의 손실과 비교해 A영역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A영역 구성원들이 서로 맺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이익관계에 따라 연쇄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곧 사회적 저항이 생긴다.
아이러니한 것은 위에서 제시했던 조합 입장에서 생산된 논리는 A의 입장에도 이식이 가능하다. 별다른 자구책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구조를 받아드리는 측의 입장은 조합이라는 하나의 권력체제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타방에게 제시하는 일방적인 고통분담 구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합의 논리와 같이 저항해야 할 필요가 생기며 손실이 클 수록 저항은 더욱 강해질 수 밖에 없다. 아래 그림과 같이 표현해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권익보호를 위해 이런 저항이 생기게 되면 매도가 뒤따르게 된다는 점이다. 조합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권익보호를 위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저돌적인 단무지들에 의해 순식간에 매도 되버리고 만다. 이유는 기득권, 자본가에 부화뇌동 한다는 것이다. 솔직한 이유는 사실 그런 저항이 조합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좀더 재미있는 부분은 실험적으로 제시해본 이런 설정에 대해 영락없이 저항의 대상이었던 자본가나 사용자측에서나 볼 수 있는 엇비슷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진영논리에 찌든 단무지의 한계를 확인해봤으니 더 이상 언급할 가치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손실이 확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국 (자발적 판단이든 사회적 요청이든) 제도적 개입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에서 계급이 계급을 서로 배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상황은 종료되더라도 앙금이 남는다.
이동안 정서적 괴리감과 손익관계가 서로 복합적인 상승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전자가 약한 작용을 한다면 후자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후자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은 쌍용차 사건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이 역시도 손익관계에 따라 계급이 계급을 배반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결국 해고자와 비해고자의 이익관점들이 달랐을 뿐이다.
이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이고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환경이다.
연대를 아무리 강조해도 어려운 형편이다.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같은 조직 내에서도 이익관계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니 그것 이상의 범위에서 지속적인 연대의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간다..
결국 조직 단위의 연대만이 그나마 가능할 뿐이다. 물론 이것도 각자 어떤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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